이우 [지역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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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혁과 수필-비움
2021년02월02일 17:49   조회수:147   출처:청도조선족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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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비움

이문혁

 

비움


 

요즘은 스마트폰 시대이다. 폰 기능이 모두 스마트하여 초창기의 아나로그 폰이나 그 후에 나온 폴더폰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기능이 뛰어나다.

화면을 터치만 하면 사용 가능한 편이성때문에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너나없이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통화는 물론이고 고화질의 카메라 장착으로 사진, 비디오 촬영 심지어 위쳇 또는 카톡으로 화상통화까지 가능하고 게임도 하고 영화 및 드라마를 다운하여 보기도 한다. 그리고 촬영한 그 소중한 순간의 사진이나 비디오를 폰에 메모리하고 영화, 드라마를 다운하다보니 폰의 메모리가 보통 8G에서 많게는 64G로 업그레드 되어도 부족하여 스마트 기능이 먹통되는 현상이 발생되군 한다. 메모리 한계를 벗어나서 아무리 기능이 출중한 스마트한 폰이라도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메모리된 사진, 비디오 혹은 필요없는 앱을 삭제하거나 소중한 자료들을 컴퓨터에 저장하여 메모리할 공간을 비워야만 폰의 스마트한 기능을 지속적으로 사용가능할뿐만 아니라 새롭고 참신한 사진이나 비디오를 메모리할 수 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삶이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할지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종종 욕심에 눈이 멀어 버러야 할 것을 버리거나 떨치지 못한다. 행복한 삶은 얼마나 잘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우리들의 인생살이는 겨우 버리고 얻음의 반복에 불과할뿐이다. 이것이 진정 삶의 철학이다.

노자(老子)는 “적게 버리면 적게 얻고 버리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크게 버리면 큰 것을 얻는다”라고 말했다. 먼저 버려야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고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사득(舍得)인 것이다. 버릴 사()와 얻을 득()인 것이다. 사득(舍得)의 어원을 찾아보니 불경 요범사훈(了凡四)에 최초로 쓰인 단어로써 엄청 심오한 뜻을 품고 있다. 버린다는 뜻의 사(舍)와 얻는다는 뜻의 득(得)을 함께 붙여서 모순(矛盾), 천지(天地), 음양(阴阳)처럼 모순체로서 상생상극이자 동시에 조합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버리다라는 뜻의 사(舍)를 얻다라는 뜻의 득(得)의 앞에 놓았을까? 얻으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버려야 하고 버려야만 비로서 얻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옛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사냥을 즐기는 국왕과 재상이 함께 말을 타고 산으로 향했다. 산 속에서 표범을 발견하고 국왕이 화살로 명중하였다. 국왕이 말에서 내려 포획한 표범을 잡으려는 순간 표범이 악착스럽게 최후의 힘을 다해 국왕에게 덮쳐 국왕의 약지손가락을 한마디 물어 뜯었다. 왕궁에 돌아온 국왕은 재상과 술로 고통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재상이 위로의 말로 웃으면서 “국왕님, 너무 속상해 마십시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을 겁니다.”라고 하지 않는가? 화가 상투까지 치민 국왕이 크게 노하면서 “너의 죄를 물어 당장 너를 옥에 감금할 것이니 너도 얻는 것이 있을까?”라고 하자 재상이 “그렇다면 저 또한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라며 덤덤히 답하였다. 국왕은 그 즉시 재상을 감옥에 감금시켰다.

한달 후 상처가 다 아문 국왕은 혼자 깊은 산 속까지 가게 되였다. 갑자기 국왕 앞에 토착인(土著人)이 나타나서 바줄로 꽁꽁 묶어 부락으로 데려갔다. 산 중의 원시부락에서는 매번 만월 보름날에 산에서 내려와 만월여신을 공경하는 희생품을 찾는 것이었다. 토착인들은 국왕을 태워 죽이려는 것이었다.

국왕이 절망하고 있을 때 제사를 지내려던 토착인이 갑자기 당황질색하지 않는가? 그자가 국왕의 약지 손가락 한마디가 없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완벽한 제사품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제사품을 받으면 만월여신이 크게 화를 내실게 분명하다. 토착인들은 하는 수 없이 국왕을 순순히 풀어주었다.

목숨을 건진 국왕은 왕궁에 돌아와서 날뛸 것처럼 기뻐하며 재상을 풀어주고 연회를 배풀었다. 국왕이 재상에게 술을 권하며 “당신이 말한 말에 일리가 있소.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군. 표범에게 물리지 않았더라면 오늘 목숨을 잃을 번 했소”라고 치하하면서 “그런데 재상, 당신은 한달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는데 얻은 것이 뭐가 있소?”라고 물었다. 재상은 술을 천천히 한모금을 마시고나서 “만약 저가 감옥에 갇혀있지 않았더라면 이번에도 국왕님과 함께 동행했을 것입니다. 토착인이 국왕님이 제사품에 적합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저가 제사품이 되지 않았을까요?.”라는 것이였다.

국왕은 “옳구나. 잃는 것이 없으면 얻는 것이 없구나”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잃은 것은 과감히 버리야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치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반드시 사와 득의 이치와 척도를 깨달아야 하고 그 깨달음이 곧 삶의 지혜가 되는 것이고 사와 득의 조화와 통일을 추구할수 있다.

요즘 백세시대의 길고 긴 인생의 려정에서 우리들은 많고 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매일마다 얻고 잃는 것이 수없이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잃은 것을 또는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포기할줄 알아야만 비로소 마음 속의 평온을 찾아 더욱 성숙된 모습으로 성장하고 발전한다.

말하기는 쉽지만 행동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잃어버린 것에 대해 미련을 못 버리고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돌게 한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였다고 생각하면 쓸모 없는 그것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게 된다.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영원히 실망할 일이 없다”는 말이 일리가 있다. 돈과 명예, 지위 어느 것 하나 영원히 그리고 과다하게 소유할 필요가 없듯이 때로는 포기하기가 힘들고 원치 않아도 그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공수래 공수거”,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그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음을 알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 엄연한 진리를 망각하고 있다가 임종해야만 새삼스레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일부는 스스로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포기란 단순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뒤를 돌아보고 버릴 것은 버리고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버리지 못함은 모두 과다한 욕망때문이다. 사람들은 욕심이나 환상에 사로잡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정작 가지고 있는 것을 선뜻 내놓지 못한다. 자신 속에 있는 욕망의 끈을 모두 부여잡고 그것을 내려놓지 않으면서 수많은 고민과 생각에 스스로를 칭칭 감아놓고 살아가군 한다.

그러나 채우기만 하고 정작 비울 것을 비우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동물의 신진대사와 동일하다. 신진대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체와 같을 것이다. 스스로 매일마다 비울 땐 확실히 비워야 비로서 새로운 것이 채워지기 마련이고 또 그 새로운 채움이 밑거름이 되어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비우는 습관은 우주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으로서 단순한 버림이 아니라 용량을 키우고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마치 물이 흐르듯이 채워지면 비워야 하고 비우면 채워진다.

요즘에도 우리 주위에는 채우기만 하고 비울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호랑이”든 “파리”든 그 사이에 끼어있는 “하이에나”든 소위 이 사회의 지도층이란 사람들이 하는 각종 행태에서 더욱 그런 것을 실감나게 느끼게 된다. 몇천만위안 나아가서 몇억위안의 자산으로 수없이 채워도 끝이 없이 무조건 많이 꼭꼭 채우려고만 한다. 특히 권한이 주어진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권한을 함부로 사용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욕심을 채운다. 결국 그들의 채움은 그것이 자신을 짓누르고 앞날을 망치는 짐이 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다. 하지만 대나무는 굳고 곧게 자란다. 대나무는 무엇이든 자꾸 채우려고 하지 않고 비움으로써 강하고 내실있는 유연함을 갖춰서 대나무 자신만의 미학을 우리들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대나무는 줄기와 잎이 아릅답고 깨끗하여 사람들한테서 사랑 받는다. 그 성질이 맑고 차고 푸르고 곧다. 청아하고 고고한 품위와 맵시, 매서운 추위 속에서 오히려 더욱 돋보이는 짙푸른 기개, 깨끗하게 안을 비워두는 결백함으로 품위가 있는 진정한 정인군자의 모습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욕망에서 비롯되고 최대의 화는 족함을 알지 못한데서 오며 최대의 과오는 이익을 탐내는 것에서 온다.”고 노자는 강조하였다. 노자의 이러한 사상은 무엇보다 본분을 자기 스스로 지키고 자신의 마음을 비울 것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족함을 아는 것이며 마음을 비워 깨끗하게 하는 것에 있다.

비움은 창조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생각이 순환될 공간이 마련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비움의 지혜가 바로 이것이다. 비울 때 비로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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